왜 설계를 하는가(4)_경쟁입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는 고된 업무를 마감하고 새벽에 침대에 누워 계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요. 저도 설계하던 시절에는 새벽까지 작업을 마친 후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서 회사 앞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자곤 했습니다. 심지어 그 사우나는 회사 식권을 받아 주기도 했죠. 그 당시 직원 입장에서는 일종의 복지였던 것 같습니다. 요새는 참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서 근로시간에 관한 정책적인 말씀을 드릴 것은 아니지만,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납품 직전에는 주 80시간에서 100시간씩 입력한 적도 많았습니다. 낭만의 시대이자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우리 설계쟁이들이 그렇게 많은 급여를 받고 설계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업무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시급은 더욱 아쉬워집니다. 월급을 꽤나 많이 준다는 곳에 다녀도 시급은 최저시급과 간신히 겨룰 수 있을 정도인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설계를 하는 것일까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불일치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설계가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설계는 재미가 있습니다. 내가 상상했던 무언가가 실체화될 수 있다는 건축설계 프로세스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한(사실은,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낸 그림을 실체화시킬 수 있다니, 그런 꿈만 같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공학적 상상력까지 겸비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설계는 미친 듯이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해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문득 상상한 어떤 공간이 ‘건축Architecture’이라는 과정을 통해 현실에 구현된다는 관념적인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때가 있습니다. 한창 때에는 모형만 완성해도 그 뿌듯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학부 시절 설계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모형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본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필드는 학교와는 다릅니다. 학교 스튜디오에서 하던 설계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필드에서는 남의 돈으로 설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돈을 쓰고 하는 공부와 돈을 받고 하는 일은 분명히 다릅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에서는 계획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취향도 건축주의 취향에 맞추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건축주와 충분히 상의하여 의견을 맞추어 계획을 진행하는 것이 맞겠지만, 아시다시피 쉽지 않습니다.
건축주의 입맛대로, 라는 속성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행위가 바로 현상공모입니다. 경쟁입찰이라고도 하지요. 건축주는 경쟁입찰을 통해 여러 가지 설계공모안을 제출받은 후 평가하여 설계자를 선정하게 됩니다. 다른 전문직역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등등.. 이러한 전문직역에서도 사실상의 경쟁입찰을 통해 수주하는 일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절대 주류적인 흐름은 아닙니다. 반면 건축사 직역에서는 경쟁입찰이 너무도 당연하게 설계자 선정의 전제요건이 되어 있습니다. 건축주의 취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설계자를 선정해야 하는 업무의 성질이 반영된 현상일 것입니다.
특히 공법의 영역에 들어가면 더욱 그렇습니다. 도시정비사업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강한 공법적 통제를 가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이익, 시민 참여, 투명성 강화, 도시계획고권 등을 그 헌법적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경쟁입찰을 법적인 원칙으로 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건설사업에서 오랜 시간 누적된 비리가 주된 원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일반 민간사업에서는 크게 문제되는 케이스가 없지만 사업의 규모가 크고 공법적 통제가 가해지는 도시정비사업의 경우 문제가 자주 발생합니다.
객관적인 실적과 조건으로 평가하는 정량적 경쟁입찰의 경우와는 다르게 건축설계 현상공모의 경우는 정성적 평가로 당선 여부가 주로 갈리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공모안에서도 어느 정도의 허풍을 통해 상대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런데 덤핑수주 문제와 같은 결에서 이러한 과장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과장부터 거짓말이 되고 위법하게 되는 것인지 아직까지 명확한 해석은 없습니다. 다만, 아래 판결을 통해 어느 정도는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제29조(계약의 방법 및 시공자 선정 등)
① 추진위원장 또는 사업시행자(청산인을 포함한다)는 이 법 또는 다른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약(공사, 용역, 물품구매 및 제조 등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을 체결하려면 일반경쟁에 부쳐야 한다. 다만, 계약규모, 재난의 발생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입찰 참가자를 지명(指名)하여 경쟁에 부치거나 수의계약(隨意契約)으로 할 수 있다.
대법원 2017.5.30.선고 2014다61340판결 [조합총회결의무효확인]
첨부파일
대법원 2017. 5. 30. 선고 2014다61340 판결.pdf
[판결요지]
[1]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2013. 3. 23. 법률 제11690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1조 제1항 본문은 계약 상대방 선정의 절차와 방법에 관하여 조합총회에서 ‘경쟁입찰’의 방법으로 하도록 규정함으로써, 계약 상대방 선정의 방법을 법률에서 직접 제한하고 제한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있다. 다만 경쟁입찰의 실시를 위한 절차 등 세부적 내용만을 국토해양부장관이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이고, 이것이 계약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사항으로서 입법자가 반드시 법률로써 규율하여야 하는 사항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경쟁입찰’은 경쟁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입찰자 중 입찰 시행자에게 가장 유리한 입찰참가인을 낙찰자로 하는 것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위 규정이 낙찰자 선정 기준을 전혀 규정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위 규정은 법률유보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
[2]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2013. 3. 23. 법률 제11690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이라 한다) 제11조 제1항 본문은 정비사업의 시공자 선정과정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절차나 그에 관한 평가와 의사결정 방법 등의 세부적 내용에 관하여 국토해양부장관이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는데, 이는 전문적·기술적 사항이자 경미한 사항으로서 업무의 성질상 위임이 불가피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입찰의 개념이나 민사법의 일반 원리에 따른 절차 등을 고려하면, 위 규정에 따라 국토해양부장관이 규율할 내용은 경쟁입찰의 구체적 종류, 입찰공고, 응찰, 낙찰로 이어지는 세부적인 입찰절차와 일정, 의사결정 방식 등의 제한에 관한 것으로서 공정한 경쟁을 담보할 수 있는 방식이 될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으므로 포괄위임금지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 도시정비법 제11조 제1항 본문이 시공자 선정에 관해 매우 추상적인 기준만을 정하여 명확성 원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도 없다.
또한 위 규정은 정비사업의 시공자 선정절차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서, 달리 시공자 선정의 공정성을 확보하면서도 조합이나 계약 상대방의 자유를 덜 제한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어렵고, 그로 인하여 사업시행자인 조합 등이 받는 불이익이 달성되는 공익보다 크다고 할 수 없으므로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하여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3]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2013. 3. 23. 법률 제11690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이라 한다) 제11조 제1항 본문의 내용과 입법 취지, 이 규정을 위반한 행위를 유효로 한다면 정비사업의 핵심적 절차인 시공자 선정에 관한 조합원 간의 분쟁을 유발하고 그 선정 과정의 투명성·공정성이 침해됨으로써 조합원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할 것으로 보이는 점, 구 도시정비법 제84조의3 제1호에서 위 규정을 위반한 경우에 형사처벌을 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면, 구 도시정비법 제11조 제1항 본문은 강행규정으로서 이를 위반하여 경쟁입찰의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이루어진 입찰과 시공자 선정결의는 당연히 무효라고 보아야 한다. 나아가 형식적으로는 경쟁입찰의 방법에 따라 조합총회에서 시공자 선정결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구 도시정비법 제11조 제1항 본문에서 경쟁입찰에 의하여 시공사를 정하도록 한 취지를 잠탈하는 경우에도 위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조합이나 입찰 참가업체가 시공자 선정과정에서 조합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하여 시공자 선정동의서를 매수하는 등 시공자 선정 기준, 조합의 정관, 입찰참여지침서나 홍보지침서 등에서 정한 절차나 금지사항을 위반하는 부정한 행위를 하였고, 이러한 부정행위가 시공자 선정에 관한 총회결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리딩케이스는 비위행위가 “총회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경쟁입찰의 취지가 잠탈된 경우에는 당연히 선정결의가 무효가 된다는 취지입니다. 설계안에서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이 허용되는 것은 사회통념상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설계공모의 지침을 완전히 위반하여 건축주를 착오에 빠뜨리는 정도로 나아가면 안되겠지요. 이해를 돕기 위한 정성적 표현을 넘어 정량적 평가가 가능한 영역에서의 과장도 허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관념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로 선동하여 수주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영업할 경우에도 그것이 바람직한 영업이라고 생각하고 환영할 자신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변에서 정도를 지키며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으로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정도를 지켜서 일하면 됩니다.
건축사는 당연히 건축사윤리선언을 준수해야 합니다.
인격이 돈벌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023.11.22.
변호사 이규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