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설계를 하는가(7)_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건축사 자격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내기에 앞서, 최근에 선고된 판결 하나를 가지고 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건축사에 관하여 제가 쓰는 글의 많은 부분에서 ‘신뢰’에 관한 고민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신뢰가 빠른 속도로 희미해져 가고 있는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신기하게도 한국은 100만 원이 넘는 휴대폰을 ‘자리를 맡아두는 용도’로 던져 두고 사라지더라도 분실되지 않는 사회이지만, 거래관계에서의 사회적 신뢰는 아주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가 같은 사회에 공존한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거래관계에서의 사회적 신뢰 하락의 문제는 심각하게 사회 전체의 건강을 좀먹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말장난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설계판’**에 관한 글을 쓸 때 주로 인용하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unto you.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인류가 발전시킨 수많은 문화, 종교 등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일반원칙입니다. 남이 정직하기 원한다면, 자신도 정직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민법에는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으로 반영되어, 민사법의 일반원칙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신의칙을 주장하면 애처로운 눈길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일상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민사적 법률관계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Bona fides, 신의성실의 원칙, 줄여서 신의칙은 모든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성실히 행동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법원칙입니다. 비단 민사법 체계 뿐만이 아니라 모든 법률관계는 신의칙이 적용됩니다. 공법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소송대리한 사건 중 지난주 선고된 아래 사건은 변론을 진행하는 내내 제게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습니다.
첨부파일
서울중앙지방법원-2023가합82207.pdf
[▲판결문 다운로드]
원고는 설계사무소, **피고는 건축주(발주자)**입니다. 원고가 설계용역비를 청구한 사건입니다.
원고는 설계용역계약의 내용에 따라 피고를 대리하여 서울특별시 소위원회 심의를 진행하였으나, 보완의견을 받아 부결되었습니다. 이후 같은 소위원회에서 심의가 가결되었습니다. 이후 절차대로 본심의가 진행되고, 조건부의결로 건축심의는 가결되었습니다.
원고는 설계용역계약에 따라 약정된 용역비를 청구하였습니다. 예상하셨다시피 피고는 용역비를 지급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변명으로 차일피일 지급기한을 미룰 뿐이어서 결국 원고는 용역비 청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크게 다툴 만한 사실관계가 없는 사건으로 보였기에 큰 부담은 갖지 않고 수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대방이 여러 가지 거짓 주장을 펼치기 전까지는 그래 보였습니다.
피고의 주장과 그에 관한 판시사항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이 사건 용역비 지급조건이 달성되지 않았다는 주장
- 원고가 소위원회 심의를 신청하였다가 부결되었고, 건축심의는 조건부의결로 통과한 것에 불과하므로 애초 약정하였던 건축심의를 모두 통과한 것이 아니다. 용역비 지급조건이 달성되지 않았다.
[판시사항]
(1) 건축심의에서 제반 분야가 모두 포함된 계획안이 제출되고 각 분야 심의위원이 각자 심의하였다.
(2) 조건부의결이란 ‘반려’나 ‘보류’와는 구분되는 (통과)의결이다.
(3) 조건부의결을 받으면 사업시행주체는 의견을 반영하여 사업시행계획인가를 신청하면 된다.
(4) 소위원회는 결국 가결되었다.
피고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2. 불완전이행을 이유로 용역비를 감액하여야 한다는 주장
- 원고의 설계도서는 자연지반녹지율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 원고의 설계도서는 설계를 잘못하여 추가 굴착이 필요하게 되었다.
- 원고의 설계도서는 지하층 수영장을 위한 기계실 설계를 누락하였다.
[판시사항]
(1) 자연지반녹지율에 관한 법적 기준이 충족되어 설계되어 있다.
(2) 지하7층 설계안에서 지하8층 설계안으로 변경하게 된 경위를 살피면 원고의 불완전이행으로 인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3) 지하층 수영장 기계실은 올바르게 설계되어 있다.
피고의 위 감액 주장은 이유 없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3조(법정이율)
① 금전채무의 전부 또는 일부의 이행을 명하는 판결(심판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을 선고할 경우, 금전채무 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액 산정의 기준이 되는 법정이율은 그 금전채무의 이행을 구하는 소장(訴狀) 또는 이에 준하는 서면(書面)이 채무자에게 송달된 날의 다음 날부터는 연 100분의 40 이내의 범위에서 「은행법」에 따른 은행이 적용하는 연체금리 등 경제 여건을 고려하여 대통령령**(필자 주: 12%)**으로 정하는 이율에 따른다. 다만, 「민사소송법」 제251조에 규정된 소(訴)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채무자에게 그 이행의무가 있음을 선언하는 사실심(事實審) 판결이 선고되기 전까지 채무자가 그 이행의무의 존재 여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抗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타당한 범위에서 제1항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소촉법’이라고 합니다)은 소송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채무자에게 소장이 송달된 다음날부터는 12%(시행령)의 지연손해금을 적용토록 하면서, 채무자가 다투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소장 송달이 아닌 그 판결의 확정시 등 이후의 시점으로 12%의 지연손해금률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다툴 만 한 분쟁의 경우에는 소송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소촉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규정의 취지이자 실무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소장 송달시부터(지급명령에 대한 이의신청으로 소송이 개시되었으므로, 지급명령의 송달 시점을 말함) 소촉법상 지연손해금률을 적용한 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다툴 만한 것이 아닌데 다투어 시간이 지연되었으므로 높은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법원의 간접적 의사표시가 주문에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실로 그랬습니다. 별로 다툴 것이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줘야 할 용역비를 주지 않았고, 지급조건도 만족된 상태였기 때문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발주자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당황스러운 거짓말을 법정에서 당당히 늘어놓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건축심의 조건부의결은 조건부이므로 통과가 아니라는 항변처럼, 상대방이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하는 허황된 주장은 반박하는 것도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왜 조건부의결도 통과의결에 해당하는지 상세히 밝히지 않으면 계속 말꼬리를 잡힐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건축 인허가 프로세스를 직접 진행해 보았던 경험에 비추어 구체적인 반박으로 거짓말을 탄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건축가들은 건축주의 요청에 의하여 여러 가지의 설계변경을 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건축주가 어떤 요청을 했는지 명확한 데이터가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상대방은 이번에도 그랬을 것을 예상하고, 설계자의 잘못으로 설계변경이 필요하게 되었고 공사비가 더 지출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용역비를 감액해 달라는 주장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건축주와의 회의가 전부 녹음된 녹음파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였습니다.
다들 알고 계실 수도 있겠는데요, 회의에 참석하여 발언에 참여한 자가 회의 내용을 녹음하는 것은 위법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은 녹음이라도 그렇습니다. 건축가 여러분은 항상 회의 내용을 녹음하거나, 최소한 회의록을 남겨 서명을 받는 등 건축주의 요청사항을 상세히 기록해 두어야 이러한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통화녹음, 카카오톡 등 데이터로 남길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총동원하여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저는 회의 과정을 녹음한 파일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청취한 뒤, 녹음 파일들에 기초하여 작성한 녹취록을 대량으로 작성하여 제출하였으며 결국 상대방(발주자)의 요청에 의하여 설계변경이 진행되었던 경위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법원은 저희 쪽 주장을 받아들여 설계변경에 설계자의 귀책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상대방은 폐지된 지 20년도 더 된 법률을 가져와서 원고 측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하거나, 출처도 알 수 없는 제3자가 그린 설계도면을 가져와서 원고의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정도로 명백한 거짓말을 탄핵하는 데에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건설법제도의 변화를 연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제게는 이미 폐지된 법률을 제출하는 행위가 소송사기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이 ‘하나만 걸리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거짓말을 투망식으로 늘어놓았으나, 저는 하나하나 구체적이고 성실하게 반박자료를 제출하였고 결국은 전부승소 판결과 함께, 소촉법상 12%의 지연손해금률도 소 제기시부터 받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거래관계에서 상호간의 신뢰 없이는 제대로 된 업무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아무런 조건 없이 신뢰하면 결국 뒤통수를 맞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건축가들의 대부분은 건축주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건축가들 스스로가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게, 나쁘게 말하면 순진하게 거래관계에 임하고 있는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관계에 임합니다. 비단 제가 법률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로 인하여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사회에 임하면, 마찬가지로 상대방 쪽에서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건축가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좋습니다.
다만, 아무런 대비책 없이 무조건적 신뢰를 가정하고 업무에 임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건에서도, “저 건축주가 정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 가장 컸습니다. 설계자 여러분들께서는 통화녹음, 이메일 저장, 회의내용 기록(녹취를 추천합니다)을 필수로 항상 수행하시고, 업무상 분쟁이 이미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것이 예견되는 경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법률 전문가의 자문을 받으시기를 권고해 드립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The laws aid the vigilant, not the negligent.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행사하지 않는다면 법은 여러분을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리가 무엇인지,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떠한 방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지 항상 생각하고, 확인하고, 모든 것을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열심히 그린 설계도서를 납품한다고 당연히 설계비가 계좌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건축가 여러분이 깨어 있으시고 보장된 권리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규 황
한국 변호사 | 한국 건축사
202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