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설계를 하는가(11)_도장의 무게
저는 설계도면에 제 이름을 올려 본 적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적으로 건축사로서 날인하거나 서명권한을 행사한 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저는 수많은 도면을 그렸고, 수많은 계획을 수립했으며, 수많은 구조와 수치에 대해 검토하고 또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니 설계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설계에 대한 법적 책임의 주체가 저였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설계 업무에서는 대표건축사가 모든 도서의 날인을 일괄적으로 수행하고, 실제 설계를 수행한 수많은 건축사들은 그 책임의 외곽에 놓인 채 실무만을 담당하는 구조가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는 건축사법의 명문 규정과도 일정 부분 부합하고 있으며, 실무상 효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굳어진 관행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건축사’라는 자격이 흔히 체감하는 무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는 모순이 시작된 것입니다.
첨부파일
건축사법(법률)(제18826호)(20220804).pdf
건축사법 제21조는 ‘건축사는 건축사업무의 품질을 보증하기 위하여 자신이 작성한 설계도서, 공사감리보고서, 그 밖에 관계 법령에서 건축사가 작성하도록 규정한 서류(이하 이 조에서 “설계도서등”이라 한다)에 서명날인(署名捺印)을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절차의 완료 요건이 아닙니다.
도면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그 행위는, 공간의 논리와 구조의 질서, 도시법제의 규율, 물리적 안전성과 문화적 맥락까지를 고려한 판단이 있었음을 선언하는 일입니다.
즉, 서명은 실무의 종결이 아니라, 그 설계행위를 ‘사회적 행위’로 격상시키는 의례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중요한 절차를 대표건축사 한 사람에게만 집중시켜 놓고 있습니다.
총원 1,000명이 넘는 건축사사무소에서도 모든 설계도서에 단 한 명의 날인만이 올라가는 현실과, 실제 설계의 핵심을 담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과연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모든 도서가 제출되고 허가가 이뤄지는 구조.
이는 건축사 자격의 진정한 무게를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건축허가의 단계에서부터 실제 설계를 담당한 건축사의 서명과 날인이 의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계획과 설계를 수행한 이의 판단과 양심이 공적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면, 그 도면은 누군가의 손을 빌려 그려졌을 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선들의 집합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는 단지 실무 책임의 문제를 넘어서, 건축사 자격의 정당성과 존엄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떠한 자격이란 시험을 통해 얻어지는 면허증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격에 부합하는 책임의 구조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조가 정착될 때, 건축사 자격은 단순한 ‘면허’가 아니라 건축 행위 전반에 대한 신뢰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건축사사무소를 열 계획은 없습니다. 대신, 변호사로서의 직무를 통해 건축사 제도와 실무 구조의 내실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률가의 시선으로 건축 설계와 관련된 제도, 책임 구조, 분쟁 예방 시스템을 검토하고 보완하는 일이 제가 두 자격 사이에서 선택한 길이며, 또 제가 설계를 떠나지 않는 방식입니다.
설계는 단순히 공간을 계획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 공간의 모든 결과에 대하여 “내가 동의하였다”는 선언이며, 그 선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사회에 남기게 됩니다.
저는 아직 도면에 이름을 남겨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제 손을 떠난 도면이 누군가의 삶을 담아내는 책임을 상상합니다.
설계는 권리가 아니라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야말로, 건축사가 가져야 할 가장 정직한 특권입니다.
2025.04.09.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