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설계를 하는가(13)_설계자의 책임범위

건축사 · 2025. 4. 13.



도면 한 장, 기준 한 줄, 배관의 위치 하나에도 수많은 고려와 판단이 쌓여 있지만, 그 결과는 때로 사용자의 민원이나 사고라는 이름으로 설계자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 설계자는 끝까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진행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통해, 그 예측 불가능한 책임의 흐름 속에서 설계자가 얼마나 쉽게 법정에 서게 되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어렵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야 하는지를 절감하였습니다.

김포의 한 공공임대아파트에서 발생한 발코니 급수관의 결빙 사고는, 설계자의 법적 책임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실무적으로 되묻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피고 건축사사무소의 대리인으로서 소송 전 과정에 직접 참여하였고, 판결까지의 긴 여정 속에서 건축사로서의 경험과 변호사로서의 논리를 함께 동원하여 설계자의 책임을 방어해냈습니다.

원고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이 사건에서 (준공 이후에 발주자 임의로 진행한)외단열공사, 전기 컨벡터 설치, 관련 설계 및 검토 용역비 등으로 구성된 손해배상금 약 35억 원을 청구하였습니다. 소장에 명시된 청구취지를 보면 피고 시공사 및 보증인, 그리고 피고 설계자들에게 순차적·예비적으로 전액을 배상하라는 주장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 청구는 오로지 하나의 전제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세탁실 발코니 급수관의 결빙은 곧 하자이며, 이는 설계 또는 시공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판결 결과는 달랐습니다. 재판부는 모든 책임을 설계자에게 돌릴 수 없다고 보았고, 실제 손해배상책임의 범위도 엄격하게 제한하였습니다. 피고 설계사무소에게 인정된 손해배상 금액은 총 800만원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원고 청구금액의 약 0.25%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사실상 전부 기각에 가까운 결과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세탁실 급수관의 배치는, 당시 적용되던 2014년 LH 설계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해당 지침은 발코니 급수배관에 외단열이나 발열선 등을 요구하지 않았고, 설계자는 지침에 따라 벽체 내 매립형 급수관을 계획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설계였으며, 이후 실제 다수 피해가 발생한 뒤인 2018년에서야 LH 스스로의 반성적 고려에 의하여 기준이 개정되었습니다. 이처럼 설계 당시에는 어떠한 과업지시나 법적인 기준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사후적으로 피해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책임을 설계자에게 돌리는 것은 구조적으로 부당한 일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책임 소재의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설계자는 어디까지 예견해야 하는가’, ‘기준을 지킨 설계는 정말 안전한가’, ‘사후적인 피해를 설계자의 과실로 환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이면에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설계자로서 일할 때에도, 그리고 지금 법률가로서 설계자의 책임을 변론할 때에도, 이 물음은 저를 끝까지 따라옵니다.

그 점에서 이 사건은 또 다른 질문을 남깁니다. 이 사건의 원고는 다름 아닌 공공임대주택을 책임지는 공기업, 한국토지주택공사(LH)였습니다. LH는 국가 주거복지 실현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자, 건축 설계의 기준과 방향을 직접 제시하고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그런 LH가 자신이 정한 설계기준에 따라 건축된 주택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하여, 그 기준에 충실했던 설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한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대목입니다.

공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냉정히 분석하고 제도와 기준의 개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LH는 민원 대응과 책임 회피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이 정한 기준을 충실히 준수한 설계자에게 막대한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단순히 민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후 외단열 공사를 임의로 단행하고, 그 비용 전액을 설계자에게 청구한 것은, 공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기도 합니다.

설계자는 물론 법률이 정한 기준을 따라야 하며, 그 외의 선택에 관하여는 발주자의 과업지시와 발주자의 설계지침을 충실히 준수하여 설계하여야 합니다. 그 기준을 만든 기관이, 필요할 때는 그것을 근거로 승인하고, 필요 없을 때는 그것을 부정한다면, 과연 어떤 설계자가 기준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설계자의 판단이 무게를 가지기 위해서는, 기준을 둘러싼 제도와 기관 역시 자기책임의 원칙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번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설계자의 책임 문제를 넘어서 공기업의 설계지침이 가지는 법적 성질에 대한 성찰 또한 함께 요구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사는 설계자로서 과업지시내용과 설계기준을 준수하고, 발주처의 지침을 충실히 반영하여 도면을 작성하였으며, 감리와 시공도 그 기준에 따라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이상한파와 다수 세대의 민원이 쌓이면 결국 ‘설계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다시 설계자에게 되돌아오는, 이러한 구조의 위험성에 관하여, 저는 수 차례의 변론을 통해 하나하나 짚어나갔습니다.

감정인 역시 이 결빙 현상에 대하여 설계자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시공자, 감리자, 그리고 입주자의 유지관리 책임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혔으며, 법원도 이와 같은 시각을 토대로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법원은 민사법의 기본원리 및 관련 판례에 따라, 도급인의 지시에 따라 제공된 설계기준에 충실한 설계에 대해서는 설계자의 과실을 쉽게 인정할 수 없으며, 시공자의 책임 역시 별도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을 함께 설시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원이 설계자의 책임을 무한히 확장하지 않겠다는 점과 함께, 발주자가 직접 제시한 기준과 설계지침에 충실했던 설계자에게 과도한 법적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 태도를 확인시켜 준 판결이었습니다. 저는 이 결과를 단순히 소송에서의 승패가 아니라, 실무자와 법조인이 함께 고민하고 방어해낸 ‘설계의 방어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설계란 결국 판단과 결정의 집합체이고, 책임이란 그 판단의 결과를 견뎌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설계자들이 기준과 현실 사이의 좁은 경계 위에서 일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이번 판결이 그분들께 작은 근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건축사는 설계도서에 관하여 책임귀속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그 책임은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부과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이 실무에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 글을 남기는 이유입니다.

2025.04.13.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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