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용역계약] 법정으로 향하게 되는 독소조항
설계용역계약서를 검토하다 보면, 도장을 찍기도 전에 법정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조항들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소송의 그림자에 한 발을 들여놓은 셈입니다.
“설계자는 본 계약상의 공사가 준공된 이후발생한 모든 하자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진다.”
겉보기에는 설계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그럴듯한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 문구 하나로 인해, 설계자는 자신의 의무를 넘어선 과도한 법적 책임을 부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조항은 다음 몇 가 측면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1. 책임의 ‘범위’가 무제한인 점
이 문구는 설계자의 책임 대상을 전면적·무차별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설계자는 시공자나 감리자처럼 공사 현장을 직접 통제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하자에 대해 포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설계자가 부담하는 책임은 설계도서 자체의 하자에 국한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사례가 존재합니다.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 2023. 3. 8. 선고 2019가합103961 판결에서는 철판가공공장 건물 신축공사에서 발생한 건물 침하 문제와 관련하여 설계자의 책임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안의 개요:
원고는 철강 제조, 도, 소매업 등을 영위하는 회사로서 철판가공공장 건물 신축공사의 건축주입니다.
피고 C은 건축설계업 등을 영위하는 회사로서 해당 공장의 설계자입니다.
공장 완공 후 건물의 기초 및 기둥 침하 등이 발생하였습니다.
법원의 판단:
법원은 “피고 C이 이 사건 공장의 설계자이고, S.O.G 슬래브 부분의 장기허용지내력을 실제 필요한 지내력보다 낮은 100KN/m²로 설계하였으며, 이와 같은 설계상 잘못으로 인하여 위 부분에 침하가 발생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 따라서 피고 C은 이 사건 설계용역계약상 채무불이행에 따라 원고에 대하여 손해배상의무가 있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설계자의 책임 범위:
법원은 설계자의 책임을 설계용역계약상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설계자는 슬래브 부분의 보수비와 영업손실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책임의 범위는 원고가 입은 손해액의 50%로 제한되었습니다.
즉, 설계도서 자체에 하자가 있었고, 그로 인해 공사 결과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설계자는 민법상 하자담보책임 및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공 불량, 감리 부실, 유지관리 미흡 등 타인의 잘못에 기인한 하자까지 모두 설계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2. 하자담보책임과 채무불이행책임은 다릅니다
많은 계약서에서 설계자의 책임을 이야기할 때, 채무불이행책임과 하자담보책임을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법적 근거도 다르고, 적용 요건과 책임범위, 기간도 다릅니다.
채무불이행책임 (민법 제390조 이하)
근거: 계약 위반
책임요건: 귀책사유, 인과관계
존속기간: 5년의 상사소멸시효
적용범위: 계약의 이행행위 전반
하자담보책임 (민법 제667조 이하)
근거: 계약목적물의 하자 존재
책임요건: 하자의 존재 자체
존속기간: 목적물 인도일로부터의 하자담보책임기간(약정한 기간 또는 계약기간의 종료시로부터 1년)
적용범위: 설계도서 자체의 하자
설계계약이 도급계약 성질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설계자의 하자담보책임은 원칙적으로 ‘설계도서에 내재된 하자’에만 한정됩니다. 그 외의 계약상 의무 위반은 채무불이행책임으로서 인과관계 입증이 따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위 계약조항처럼 “모든 하자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하면, 둘을 혼동하여 설계자의 책임을 하자담보와 손해배상의 전방위 책임으로 확장할 여지를 열어두게 됩니다.
3.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의 범위는 ‘인과관계 있는 손해’로 제한됩니다
설계자가 설계도서의 하자에 대해 책임을 지더라도, 그 책임은 하자와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로 한정되어야 합니다.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① 계약위반이 존재하고,
② 그 위반과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며,
③ 손해는 통상손해이거나 특별손해 중 예견 가능했던 범위여야 합니다.
즉, 설계자의 책임은 손해의 발생 원인이 설계도서에 있고, 그 설계도서의 오류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만 인정됩니다. 예를 들어, 난방배관 배치의 설계 오류로 인해 특정 세대에서 동파가 발생했다면, 해당 손해에 대해서는 설계자의 책임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관리 부실, 사용자 과실, 추가적 피해 확대 등에 대해서까지 전부 책임지는 것은 부당합니다.
계약서에 “모든 하자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진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면, 민법상 책임 구조를 무시한 일방적 부담을 설계자에게 강요하는 셈이 됩니다.
4. 하자담보책임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책임의 ‘범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기간’의 설정입니다. 위 문구에는 언제까지 설계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설계자에게 사실상 무기한의 책임을 부여하는 위험한 조항입니다.
설계자는 직접 공사를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설계도서의 납품 후(준공시가 아님에 유의할 것) 1년에서 2년 정도의 기간으로 책임보증기간을 설정하는 것이 실무 관행입니다. 계약으로 책임기간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일반법률에 따라 지나치게 긴 기간 동안 책임을 부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계약서에 아래와 같은 문구를 적용하여 책임 범위와 기간을 조율할 수 있습니다.
“설계자는 본 계약에 따라 작성한 설계도서에 하자가 있을 경우, 그로 인해 계약상 목적물에 직접적으로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 계약서에 정한 책임보증기간 내에서 책임을 진다.”
이렇게 명시하면 다음 사항이 명확해집니다.
- 설계도서의 하자에 기인한 하자만 책임을 부담함
- 인과관계 있는 손해에 대해서만 책임을 부담함
- 책임기간 내에서만 책임을 부담함
실무적으로는 하자보수기간을 설계도서 납품일로부터 1년 또는 2년으로 설정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특히 대규모 민간 프로젝트의 경우, 계약금액에 비례하여 1년, 복잡한 특수설계의 경우 최대 2년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문장 하나로 인하여 당신이 법정에 설 수도 있습니다.
건축사는 당연히 자신이 작성한 설계도서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법률상 한정된 범위와 기간 내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완공 후 발생한 모든 하자에 대해 무기한 책임진다”는 조항은, 법의 원칙을 벗어나 설계자의 경력 전체를 법적 위험에 노출시키는 구조입니다.
계약서 문구 하나가 사무소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독소조항을 고치지 않는다면, 다음 설계가 아니라 소송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2025.04.16.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