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 실무자를 위한 기록 관리법(2)_회의록: 기록되지 않으면 없던 일이다
건축 설계 실무에서 회의는 일상이자 습관입니다. 설계 방향을 논의하고, 발주처의 의견을 조율하고, 감리자나 시공사와 마감 일정을 맞추는 것도 결국 회의에서 이루어집니다. 회의가 없으면 실무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뒤, 남는 건 무엇일까요? 파일도 아니고, 문서도 아니고, 메일도 아닌 ‘기억’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거 회의 때 다 정리됐던 거잖아요.”
“분명히 그렇게 하기로 협의됐습니다.”
“팀장님도 옆에서 들으셨어요.”
이 말들이 거짓은 아닐 겁니다. 그 회의는 실제로 있었고, 그 논의도 실제로 오갔을 것이며, 참석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그 책임 소재를 따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기억은 법적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물어보는 건 오직 하나입니다.
그 회의에서 그런 말이 오갔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민사소송에서 입증 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이 부담합니다. 설계자가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설계했다”고 주장하려면, 그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입증의 수단이 바로 회의록입니다.
회의록은 **“실제로 그런 회의가 있었고”, “거기서 이런 논의가 있었으며”, “그에 따라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문서입니다.
회의록이 없다면, 회의는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0명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해도, 그 중 한 사람만 기억을 다르게 말한다면 그 회의의 내용은 법적으로는 ‘불명확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회의록은 반드시 어떠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춘 문서여야 할까요? 꼭 서명과 직인이 찍혀 있어야 할까요? 꼭 회사 로고가 박힌 문서여야만 증거로 쓰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법은 ‘형식’보다는 ‘실질’을 봅니다.
회의록은 정식 문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회의 직후 요약 메일, 회의 중 작성한 메모, 팀 내 회신 내용, 회의 참석자에게 보낸 회의 내용 정리 등 작성 시점과 참석자가 명확하며, 내용이 구체적인 것이면 충분히 입증 자료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일관성과 작성 시점, 그리고 수신자의 범위입니다.
예를 들어, 회의 직후 이런 메일을 보냈다고 가정해봅시다.
[메일 예시]
제목: [○○프로젝트] 2025.04.21. 설계회의 결과 요약
본문:
회의일시: 2025.04.21. 10:00~11:00
참석자: 발주처 A, 감리 B, 설계팀 C, 구조팀 D
주요 논의사항:
주차장 진입로는 기존 계획안대로 유지
옥상 구조 상세도는 구조팀 의견 반영하여 수정
외장재는 A타일에서 B타일로 변경
후속 조치: 구조도면 수정안 4/23까지 제출, 입면 렌더링 4/24까지 재검토
위 내용에 대한 보완사항 있으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메일이 바로 회의록입니다.
반드시 당사자들의 서명이 없더라도, 내용이 구체적이고 작성 시점이 명확하고 참석자 전원이 수신자로 포함돼 있다면, 그 자체로 회의에서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회신을 하면 더 좋고, 회신이 없더라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실무가 진행되었다면 그 자체로 ‘묵시적 동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별다른 의견을 회신하지 않는 발주자에 대하여 계약상의 승인간주를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표준계약서에 관한 글에서 이미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회의록이 없는 경우, 생각보다 빠르게 상황이 꼬입니다. 설계 변경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질 수 없고, 시공자의 요구가 과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어렵고, 발주처의 지시가 정당했는지 아닌지를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은 늘 설계자에게 가장 불리한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설계방향을 결정하고 결과물(도면)을 내놓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도면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를 설계자가 설명해야 합니다.
그 설명의 시작이 바로 회의록입니다. 설계자는 도면을 그리는 사람인 동시에,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은 귀찮고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노력이, 나중에 나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일을 잘했느냐보다, 일을 잘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흐려지고, 말은 바뀝니다.
그러나 회의록은 남습니다.
그리고 법정은 언제나, 기억이 아니라 기록을 믿습니다.
2025.04.21.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