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 실무자를 위한 기록 관리법 (4)_업무일지

건축사 · 2025. 4. 23.


“오늘은 무슨 일을 했더라?”

“회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지난주였나?”

“이 도면, 언제 누구 요청으로 바꾼 거지?”

건축설계 실무자라면 누구나 퇴근길에 이런 생각 한 번쯤은 해봤을 것입니다. 프로젝트 일정이 몰리기 시작하면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며칠만 지나도 특정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누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조차 명확히 기억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억나지 않음’이 어느 순간, 실무자의 책임을 증명하거나 부인하는 중요한 순간이 됩니다. 발주처가 “분명히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요”라고 주장할 때, 시공자가 “지난 회의에서 설계팀이 변경에 동의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감리자가 “왜 이런 도면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할 때, 그 순간 우리는 ‘그때 어떤 판단을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설명의 시작이 바로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업무일지는 실무자 개인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강력한 기록 수단입니다.

많은 분들이 업무일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너무 바빠서 쓸 시간이 없어요.”

“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요.”

“어차피 아무도 안 보잖아요.”

하지만 법은 ‘누가 봤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점에, 어떤 내용을, 어떤 사람이 남겼느냐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업무일지는 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고, 회사 로고가 찍혀 있지 않아도 됩니다. 매일매일 간단하게라도 써두었고 그것이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입증 자료가 됩니다. 특히 작성 시점이 분명하고, 그 내용에 일관성이 있으며, 실제 업무 흐름과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에는 법정에서도 증거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법원은 그 기록이 ‘진짜 일어난 일을 남긴 것’이라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것이 수첩의 메모든, 자기에게 보낸 메일이든, 노션에 남긴 몇 줄짜리 업무 요약이든 간에 이를 충분히 고려합니다.

업무일지를 쓴다는 건 ‘매일 특별한 일을 정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록은 꼭 대단한 사건이나 결정이 있을 때만 남겨야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소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 판단들, 대화들, 이메일 한 통의 대응 과정이 뒤늦게는 의외로 중요한 쟁점이 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수준으로 작성된 기록이 날짜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면 업무일지로서 재판에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전 10시, 감리자 ○○와 옥상 배수 계획 관련 협의. 기존 계획 유지 요청 확인.

  • 오후 3시, 구조팀 요청에 따라 3층 보 상세도 수정 지시 받음.

  • 도면 A201 1층 평면도 버전 수정 작업 착수. 발주처 요청 반영.

이처럼 간단하게라도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판단을 했는지’를 정리해 두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왜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설계 실무자는 도면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도면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기록 없는 설계는, 언제든지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매일매일 꼼꼼하게 장문의 업무일지를 쓰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대신 자기에게 보내는 메일 한 통으로 시작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메일 제목: 2025.04.22 업무기록 – ○○ 프로젝트

메일 내용: 오전 회의 – 감리 요청 반영 / 외벽재료 변경 요청 / 다음 회의 4월 25일 예정

혹은 구글 캘린더나 스마트폰 일정 앱에 ‘간단한 메모’로 남겨두는 것도 좋습니다. 노션이나 에버노트처럼 자동 날짜가 기록되는 앱을 쓰면 더 편리하고 일관된 정리가 가능합니다.


회사 규정상 업무 메모를 디지털로 남기기 어렵다면, 종이 수첩이라도 괜찮습니다. 날짜만 적고 한두 줄이라도 적어두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증거가 될 수 있는 기록을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나는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회의를, 실무 흐름을, 판단의 과정을 글로 남겨둔 사람은 책임을 피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책임을 부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지시만 수행하는 단순한 수행자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논리를 가지고 일하는 전문가입니다.

전문가는 자신의 판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설명의 근거는 기억이 아니라 지금 남겨두는 한 줄짜리 일지입니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일지는 남습니다.

그리고 그 일지가 언젠가는 당신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도 있습니다.

2025.04.23.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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