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설계를 하는가 (15)_나는 왜 도면을 다시 그리고 있는가
건축가는 늘 무언가를 다시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 그렸던 평면이, 처음 상상했던 입면이, 처음에는 분명히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그 선들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갑니다. 처음에는 이상적이었지만, 그것은 예산에 맞지 않고, 구조가 어렵고, 시공이 까다롭고, 감리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건축주가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건축가는 한 번 더 도면을 열고, 다시 손을 얹습니다. 다시 구상을 정리하고, 다시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나는 왜 이 도면을 또다시 그리고 있는가?”
건축은 한 번 그리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건축은 끊임없이 수정하고, 조정하고, 타협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건축이란 결국 반복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그 반복은 늘 창조적이진 않습니다. 때로는 후퇴 같고, 포기 같고, 스스로의 생각을 지우는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건축주의 한마디, “이건 너무 비싸지 않나요?” 감리자의 지적, “이건 기준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시공자의 요구, “현장에서 시공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 말들이 쌓이고 쌓이면, 도면은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따라가는 건축가의 손끝은 점점 무거워지고, 마음은 점점 멀어집니다. 건축가는 결국, 자신이 왜 처음 그렇게 그렸는지를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복은 또한 건축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건축은 처음의 아름다운 스케치를 실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 손을 보는 일이고, 그렇게 다듬어진 도면이야말로 누군가가 실제로 거주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반복이 어느 순간부터는 조율이 아니라 체념이 되고, 창작이 아니라 정리가 되며, 공간을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의견을 중재하는 일이 되어갈 때에는, 우울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도면은 아직도 나의 것인가?” “이 선을 내가 그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은 매우 조용히 찾아오지만, 동시에 아주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 선 하나하나에 자신의 직업적 자존감을 담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선이 왜 여기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건 왜 이렇게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건축주가 시켜서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건축가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내 판단을 내 손으로 도면에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판단이 언제나 우리의 순수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닙니다. 현실은 복잡하고, 건축가는 수많은 관계자 사이에서 계속해서 요구를 받고, 의견을 받고, 강요를 받습니다. 어떤 날은 감리자와의 의견 차이로, 어떤 날은 시공자의 시공성 고려 때문에, 또 어떤 날은 단가 조정을 위한 제안서 수정으로 인해 도면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가는 자신의 판단을 보존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건축가의 장인정신이란, 처음 구상을 끝까지 관철하는 고집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없이 바뀌는 조건 속에서도 나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축을 다시 구성해내는 끈기이고, 처음과 달라졌더라도 그 변화에 스스로 납득하며 책임질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손을 얹는 태도입니다.
다시 그리는 일은 지우는 일이 아니라, 다시 생각하는 일입니다. 처음의 도면이 아니라, 지금의 조건에서 최선을 찾아내는 또 하나의 건축입니다. 그래서 건축가는, 단순히 도면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다시 세우는 사람입니다. 누구의 요청이든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판단의 주체가 바뀌는 건 아닙니다. 도면을 그린 사람이 건축가라면, 도면을 다시 그릴 때도 건축가는 건축가여야 합니다. 그저 받아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도면을 다시 그립니다. 어제 지웠던 선을 오늘 다시 그리고, 새로운 조건에 맞게 구조를 다시 검토하고, 설계 설명서를 다시 씁니다. 이 반복이 때로는 지치고, 고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되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 도면을 다시 그리고 있는가.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면이 내 것이 되지 않는 순간까지 그리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속에서도 자기 이름을 걸 수 있는 건축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한 번 더 그리는 것. 그게 우리가 이 선 위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2025.04.25.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