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용역계약] 그건 계약서에 없잖아요 – 거절이 어려운 순간

변호사 · 2025. 5. 8.

이건 계약서에 없잖아요.

실무자가 어렵게 꺼낸 이 말에 돌아오는 반응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계약서에 없긴 한데, 그 정도는 다 해 주잖아요.”

“설계 도면에서 빠졌으면 감리가 챙겨야지, 누가 합니까?”

“아니, 그걸 가지고 따지시는 거예요?”

실제 계약서에는 존재하지 않는 업무지만, 분위기상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흘러가는 순간, 실무자는 말문이 막힙니다. 일을 거절하면 조직에서 문제 삼을까 걱정되고, 그렇다고 아무 기준 없이 받아들이면 감당 못 할 책임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계약 외 업무는 어디까지 거절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거절하면 법적으로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계약서에 없는 업무는 원칙적으로 의무가 아닙니다. 민법상 계약은 당사자 간의 약정에 따라 성립하며, 계약의 내용은 서면이든 구두든 간에 당사자가 서로 합의한 범위에 한정됩니다. 즉,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았고, 별도로 동의한 바도 없다면 그 업무는 법적으로 이행의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만 실무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기존 계약의 목적과 성격에 비추어 ‘통상적으로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업무인지, 실제로 해당 업무를 받아들인 전례가 있었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그 업무까지 포함된다고 오해할 만한 정황이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법적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사자 일방이 주장하는 계약의 내용이 상대방에게 중대한 책임을 부과하게 되는 경우에는 문언의 내용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하고, 계약서에 표현된 당사자의 의사가 명백한데도 합리적인 근거 없이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내용을 추가하는 것은 의사해석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대법원 2023다2281521 판결 참조)

설계 계약서에 ‘기본 및 실시설계 업무 일체’라고 적혀 있다고 해도, 그 표현이 공사비 산정이나 부대설계 업무까지 포함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감리 계약에 ‘현장 업무’라고 쓰여 있어도, 설계변경 협의서 초안을 작성하는 업무까지 포함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거절해도 괜찮을까요?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계약에 없는 업무는 거절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계약상 불이익을 받거나 손해배상을 부담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무에서 중요한 건 ‘거절 그 자체’가 아니라 ‘거절의 방식’입니다.

“계약 범위를 벗어난 사항이라 별도 협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건 추가 비용이나 일정 조정 없이 진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본 계약 범위에 명시되지 않아, 정식으로 협의요청 드립니다.”

이런 식으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한 ‘협의 유도형’ 응답이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맡은 계약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실무에서 이런 점들을 미리 점검해두면 좋습니다. 계약서에 업무 범위가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는지, “일체”, “포함한다”, “등”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포괄적이지 않은지, 상대방이 자꾸 요구하는 업무에 대해 처음부터 명확히 선을 그었는지, 이메일이나 회의록으로 계약 외 업무에 대한 이견을 남겨두었는지 등을 확인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들 그렇게 해왔습니다.”라는 말에는 묘한 압박이 있습니다. 실무자는 그 말 앞에서 혼자 남겨진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법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다 그렇게 해왔다’는 말은 법적 의무를 만들지 못합니다. 결국 계약은 문서이고, 증거이며, 당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패입니다.

“계약서에 없으니까요.”라는 말이 당당하게 들릴 수 있는 환경, 그게 바로 실무자가 추구해야 할 최소한의 존엄입니다.

2025.05.08.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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