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EPC사업의 지정하수급인, 통제 없는 책임

변호사 · 2025. 5. 12.

EPC 사업은 설계(Engineering), 조달(Procurement), 시공(Construction)을 하나의 도급계약으로 묶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 안에서 원도급자인 EPC 수급자는 프로젝트의 총괄책임자로서 계약상 거의 전 영역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업무 흐름을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이 책임 구조는 겉으로 드러나는 도급체계와 달리 작동합니다. 특히 발주처가 납품업체나 시공협력업체를 ‘지정하수급인’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고정해 제공하는 경우, EPC 계약자는 실질적 선택권 없이 위험을 떠안게 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형식과 실질의 불일치가 단순한 계약상의 부담을 넘어 형사처벌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에게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아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런데 이 법은 **‘누가 얼마나 통제했는가’보다 ‘어디에 이름이 적혀 있었는가’**를 더 먼저 묻습니다. 총괄계약자인 EPC 사업자의 책임이 법적으로 일차적이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 구조 속에서 실질적인 위험의 기원을 살펴보면, 지정된 하수급인의 불완전한 시공, 발주처의 직접 간섭, 또는 공급된 자재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EPC 사업자는 실질적 통제권 없이, 책임만을 떠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대재해처벌법을 둘러싼 위헌 논의와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형벌은 원칙적으로 자기 행위에 기초하여 부과되어야 하며, 법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 있었는가’만으로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EPC 사업에서 지정하수급인의 문제가 개입되는 순간, 그 원칙은 무너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발주자가 지정한 하수급인이 일으킨 사고라 하더라도, 그로 인해 발생한 중대재해에 대해서는 도급자인 EPC 계약자와 그 경영책임자가 일차적으로 책임을 지는 구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설령 지정하수급인이 계약상 일정한 품질 보증이나 납기 준수에 관한 확약을 해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EPC 계약자의 법적 책임을 실질적으로 줄여주지는 않습니다. 민사상 손해배상의 범위를 조정하거나 구상권 행사의 근거가 될 수는 있겠지만,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적용되는 형사책임이나 행정처분에 대해서는 그러한 확약이 면책 사유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법은 실질적인 위험 통제와 예방 조치를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하수급인이 보증했다고 하더라도, 총괄사업자인 EPC 계약자가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책임이 귀속됩니다. 다시 말해, 책임은 여전히 가장 위에 있는 사람에게 향합니다.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약속은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 책임은 단지 민사적 손해배상에 그치지 않고, 형사적 책임과 행정적 불이익처분, 공공부문 입찰참가자격의 제한 등 중대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앞서 논의했듯, 중대재해처벌법은 그 구성요건 자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법률이 아닌 시행령이나 지침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실무자가 자기 행위에 기반한 방어가 가능한지조차 불투명한 상태에서, 지정된 타인의 잘못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당한 처벌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 제4조 제1항은 이 법의 핵심 조항입니다. 여기서는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종사자의 안전과 보건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하며, 이를 게을리해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문제는 이 조항이 ‘필요한 조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느 정도까지 해야 면책되는지를 법률 자체에서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시행령이나 고용노동부의 지침을 통해 보완되고 있는데, 형사처벌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부과하면서 기준이 추상적이라는 점은 여전히 위헌 논의의 중심에 있습니다.

시행령 제4조에서는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성 요소로 전담조직, 유해·위험요인 파악, 개선계획 수립 등을 들고 있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이행 기준이 아닌 ‘포괄적인 방향’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특히 EPC 사업처럼 여러 단계의 계약 구조가 얽힌 상황에서는, 어느 수준까지 구축하고 감시했어야 경영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한 것인지 판단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개선하려면, 계약 단계부터 실질적 통제범위에 대한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고, 지정하수급인에 대한 위험과 책임의 분리를 계약서에 구조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법령 해석과 운영에 있어서도 통제 가능성과 실질적 지휘 여부에 따라 형사책임의 범위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법 적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임은 가장 위에 있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귀속되고, 그 책임은 때로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형사책임은 실질과 통제에 따라야 하며, 실무자의 방어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EPC 사업에서 벌어지는 지정하수급인 구조는 단순한 실무상의 편의가 아니라, 형사처벌 구조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는 실질적 위험요소입니다. 제도가 그 위험을 방치한 채로 계속된다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지향하는 ‘책임을 통한 예방’은 결국 또 다른 구조적 불균형을 낳을 뿐입니다. 법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책임도 구조도 함께 설계되어야 합니다.

2025.05.12.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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