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책임] 위험을 알고도 외면한 설계자의 책임
설계를 하다 보면, 종종 마음속에 작은 불안이 스며듭니다.
이 구조는 너무 가볍지 않은가. 이 배치는 과연 사용자를 고려한 것인가. 저 모서리는 너무 날카롭지 않을까.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타이릅니다.
“예산이 그렇잖아.”
“기준은 충족했어.”
“감리자가 지적하면 그때 고치지 뭐.”
“설계변경 여지는 남겨 뒀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현존하는 위험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위험은 반드시 무너진다거나,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는 식의 명백한 위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알고는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어느 순간 실재하는 책임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설계자는 도면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하나의 의사표시가 됩니다.
우리 법은 설계자의 업무를 기술적 재량의 결과물로 존중합니다.
일반적인 하자나 미흡한 판단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책임을 묻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측 가능한 위험을 인지하고도 방치한 경우,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최근 판례들은 설계자의 책임에 대해 점점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위험이 객관적으로 존재했는가?”
“설계자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었는가?”
“그 위험을 회피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는가?”
도면은 제출되었지만, 그 도면이 문제를 예고하고 있었다면?
예측 가능한 위험에 관한 경고가 생략되었고, 대안은 제시되지 않았으며, 회의록에도 아무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위험을 알면서도 침묵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시다시피, 현실에서의 설계자는 언제나 최종적인 결정권자가 아닙니다.
클라이언트는 예산 압박과 함께 일정까지 압박을 주고, 시공사는 시공성과 원가를 기준으로 피드백합니다. 구조기술자, 기계설비 설계자, 감리자, 발주처 실무자, 수많은 판단자들 사이에서, 도면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줄어들고 재조정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나며 마지막으로 ‘확정된 설계도면’에 도장을 찍는 사람은, 여전히 설계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책임의 출발점이 됩니다.
위험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알면서도 외면한 것인지, 그리고 외면한 데에 어떤 구조적 강제가 있었는지. 법은 그 맥락 전체를 읽어내려 합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그때 그 위험을 정말 몰랐는가?’
‘그 위험에 대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내가 서명한 그 도면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모든 위험을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위험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설계자는 건축주의 요구와 법적 기준, 기술적 한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타협하며 도면을 그립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회색지대가 생기고, 회의 중의 무언, 삭제된 메일, 주고받지 못한 피드백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무언 속에 감춰진 위험이 실제로 사고로 이어졌다면, 법은 침묵으로 책임을 묻습니다.
안전은 시공단계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안전은 설계단계에서 이미 결정됩니다.
그리고 위험은, 그 위험을 본 사람이 말하지 않았을 때 가장 치명적인 형태로 자랍니다.
2025.07.16.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