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속 위험한 문장들 (1)] 손해배상책임, 어디까지 져야 할까?
계약서를 쓰는 순간에는 보통 분위기가 나쁘지 않습니다. 서로를 믿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하지만 그 종이 위에 적힌 몇 줄의 문장이, 몇 년 뒤에는 분쟁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특히 “손해배상책임은 계약금액을 한도로 한다”는 조항은 설계계약·감리계약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입니다. 단순한 문구처럼 보이지만, 건축주와 건축사 모두에게는 너무도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건축주의 눈으로 보면 이 조항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컨대 설계비가 1억 원인데, 설계 오류로 공사 지연이 발생해 수억 원의 추가비용이 들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위 조항 그대로라면 건축주는 1억 원까지만 배상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 손해의 크기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건축주들은 이 조항을 “설계사가 자기 책임을 줄이려는 안전장치”로 바라보게 됩니다.
반대로 건축사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설계비는 전체 공사비의 일부에 불과하고, 설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 중 상당수는 건축주나 시공사의 결정, 인허가 과정의 불확실성에 기인합니다. 설계사가 그 모든 위험을 무제한으로 부담하여야 한다면, 사실상 회사를 운영할 수 없을 정도의 리스크를 떠안게 됩니다. 예를 들어 건축주가 뒤늦게 사업 방식을 바꾸거나, 행정기관의 지연으로 일정이 늘어나도 손해는 설계사무소의 책임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건축사들은 손해배상책임의 상한선을 명확히 정하지 않으면 도저히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실무와 판례는 이 양쪽의 이해관계를 절충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법원은 일반적으로 ‘계약금액 한도로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조항을 유효하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단서가 있습니다. 고의나 중대한 과실까지 책임을 면하게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단순 실수나 경미한 과실에 대해서는 한도를 적용할 수 있지만, 중대한 오류나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제한의 책임을 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조항의 문구가 모호하거나, 상황에 맞지 않게 과도하게 책임을 제한한다면 오히려 무효로 평가될 위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제외하는지”를 미리 합의하고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손해배상책임의 범위에 설계 지연으로 인한 간접손해(이자비용, 영업손실 등)가 포함되는지, 아니면 순수한 직접 공사비 증액만 포함되는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건축주는 “최소한 시공비와 직결되는 오류는 보장받아야 한다”는 입장일 수 있고, 건축사는 “추가적인 외부 변수는 책임질 수 없다”는 입장일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 자주 마주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건축주는 계약 체결 당시 “큰 문제 없겠지” 하고 조항을 넘겼다가, 막상 문제가 터지면 “손해배상은 계약금액 한도”라는 약정 앞에서 당황합니다. 반대로 건축사는 “계약서에 분명히 써 있지 않느냐”라고 항변하지만, 법원은 조항의 해석을 좁게 보아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판단해 더 큰 배상을 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어느 한쪽이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모두에게 불완전한 결과가 나오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건축주는 계약 전에 이 조항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계약금액 한도라는 말이 ‘총액’인지, ‘잔여금액’인지, 혹은 ‘특정 손해에 한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어야 합니다. 건축사는 계약서에 단순히 한도만 쓰는 것이 아니라, 고의·중과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손해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한정해 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작은 문구 하나로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를 쓰는 순간의 분위기는 대체로 평온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계약금액을 한도로 한다”는 한 줄이 언젠가 큰 규모의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점검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갈등의 조짐이 보인다면, 내용증명 한 장만으로도 입장을 분명히 하고, 추후 법적 분쟁에서 불리한 자백으로 작용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손해배상책임 조항은 계약서 한 줄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억 원을 좌우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계약서에 이 조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지금 한 번 점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계약 해석, 일반 자문, 내용증명 발송은 상황마다 달라집니다. 전문가와 상의해 두면 분쟁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2025.10.01.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