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속 위험한 문장들 (4)] 무심코 들어가는 부제소합의, 괜찮을까?
분쟁이 한창 진행되다가 양쪽이 어느 정도 타협을 보게 되면, ‘합의서’라는 이름의 문서가 등장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조정해 당장의 문제를 마무리하자는 취지에서 작성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합의서 말미에 종종 이런 문구가 들어갑니다. “본 합의와 관련하여 당사자는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짧은 한 줄은 나중에 당사자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부제소합의’입니다.
부제소합의란 무엇인가
부제소합의란 말 그대로 ‘해당 문제에 관하여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법적으로는 ‘소송상 권리의 행사 제한에 관한 합의’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합의서에 이 문구가 들어가면, 설령 나중에 분쟁이 새로 생기더라도 법원에 소를 제기해서는 안되고, 소를 제기하더라도 부제소합의를 이유로 각하될 수 있습니다.
즉, 법정 문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애초에 소송하지 않겠다고 합의했으니, 법원이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단순한 계약처럼 보이지만, 실제 효과는 법적 구제 절차 자체를 차단하는 막강한 구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건축주와 건축사의 입장
- 건축주 입장: 분쟁을 종국적으로 정리하자는 취지에서 부제소합의를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의서 작성 당시 예상치 못한 새로운 하자가 발생하면, 부제소합의 때문에 소송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합의로 분쟁을 끝내려던” 의도가, “분쟁을 해결할 방법을 봉쇄하는” 결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 건축사 입장: 반대로 건축사의 입장에서도 부제소합의는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설계비 일부가 지급되지 않아 분쟁이 발생했을 때, 발주자가 뒤늦게 “정산합의서”를 제시하며 일부 금액만 지급하겠다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건축사는 당장의 자금 압박 때문에 합의서에 서명하지만, 그 말미에 ‘부제소합의’가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 나머지 미지급 설계비를 청구하려 해도, 이미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발목을 잡습니다. 결국 건축사가 정당하게 받아야 할 대가를 청구할 권리마저 제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원의 태도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부제소합의는 유효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제소합의가 정당한 권리구제 수단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경우에는 무효라고도 판시합니다. 예를 들어 합의와 직접 관련 없는 권리 주장까지 포괄적으로 막는 부제소합의는, 공서양속 위반이나 불공정 약관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 부제소합의를 넣더라도, 적어도 합의 불이행 시에는 소송이 가능하다는 단서를 두어야 합니다. 합의서를 작성하면서도 “이행이 보장되지 않으면 언제든 법적 대응 가능하다”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 부제소합의 문구가 있다면, 최소한 “본 합의와 직접 관련된 사항에 한정된다”는 조건을 붙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제소합의를 방패 삼아 정당한 권리 행사조차 가로막힐 수 있습니다.
이미 합의서를 작성했거나, 분쟁 중 부제소합의 조항이 문제되고 있다면, 그 효력 자체가 쟁점이 됩니다. 이럴 때는 내용증명을 통해 부제소합의 조항의 해석과 적용 범위에 대한 입장을 먼저 밝혀 두는 것이, 나중에 불리한 상황을 막는 첫걸음이 됩니다.
합의서는 분쟁을 끝내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무심코 들어간 부제소합의 한 줄은, 분쟁을 끝내기는커녕 새로운 갈등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제소합의는 단순한 계약이 아닙니다. 법적 구제 수단 자체를 제한하는 강력한 조항입니다. 지금 내 합의서에 이 문구가 들어 있다면, 그 의미와 위험을 반드시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계약 해석, 일반 자문, 내용증명 발송은 사례마다 다릅니다. 전문가와 상의해 두면 불필요한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2025.10.08.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