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속 위험한 문장들 (5)] 불가항력 조항, 정말 책임을 면하게 해줄까?
계약서를 보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문구가 있습니다. “천재지변, 전쟁, 폭동, 법령 변경, 기타 불가항력으로 인한 지연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얼핏 당연하고 무난한 조항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까지 계약당사자가 책임져야 한다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하지만 실제 분쟁 현장에서 불가항력 조항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건축주와 건축사 모두에게 뜻밖의 부담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먼저 건축주의 입장에서 보겠습니다. 건축주는 불가항력 조항을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적용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막상 분쟁이 발생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설계사무소가 일정 지연을 설명하면서 “자재공급난으로 불가항력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요? 건축주가 보기에는 시장 상황이나 공급망 차질이 관리 가능한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즉, ‘어쩔 수 없는 사정’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가 항상 문제입니다.
건축사의 입장에서는 불가항력 조항이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예컨대 코로나19 팬데믹처럼 전 세계 건설 현장이 멈춘 상황에서까지 설계 지연의 책임을 묻는다면, 설계사무소는 사실상 감당 불가능한 리스크를 떠안게 됩니다. 또 해외 프로젝트에서는 전쟁, 정권 교체, 환율 폭등 같은 변수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이런 사건들까지 모두 설계사의 책임으로 귀속된다면, 사업 자체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건축사들은 불가항력 조항을 반드시 포함시키려 하고, 적용 범위도 넓게 두고 싶어합니다.
법원의 태도는 어떨까요? 우리 법원은 코로나19 사태를 포함하여 불가항력을 매우 좁게 해석합니다. 예측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없는 아주 제한적인 사정이 인정될 때에만 불가항력으로 평가합니다. 단순한 자재 가격 상승, 인허가 지연, 협력업체의 파산 등은 보통 불가항력으로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계약서에 불가항력 조항이 들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면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이 진짜 불가항력이 맞는가?”를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분쟁이 다시 길어지곤 합니다.
실무에서는 이런 갈등이 자주 벌어집니다. 발주자는 “이건 관리 가능한 리스크”라고 주장하고, 건축사는 “계약서상의 불가항력에 해당하지 않느냐”고 맞섭니다. 판례는 대부분 발주자의 손을 들어주지만, 조항의 문구가 모호하다면 오히려 건축사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결국 불가항력 조항은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한 조항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건축주는 불가항력 조항에 “책임은 면하되, 지연된 기간만큼 계약 기간을 자동 연장한다”는 수준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단순 자재난이나 협력업체 문제는 불가항력에서 제외한다고 명확히 적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 건축사는 불가항력 조항을 단순히 두는 것에 만족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팬데믹, 국가 비상사태, 국제 제재” 등 실제로 직면할 가능성이 높은 사건을 열거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분쟁에서 입증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미 분쟁이 시작되었다면, 불가항력 조항이 적용되는지 여부부터가 핵심 쟁점이 됩니다. 이때는 내용증명으로 “불가항력 사유에 해당하므로 책임이 없다”거나, 반대로 “불가항력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지체상금이 부과된다”는 입장을 조기에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기 대응을 놓치면, 나중에 법원에서 불리한 사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 적힌 “불가항력”이라는 단어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분쟁에서는 수억 원의 책임을 갈라놓는 무게를 가집니다. 누군가에게는 면책의 방패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책임 회피의 구실이 되기도 합니다.
불가항력 조항은 반드시 필요한 조항이지만, 동시에 가장 신중하게 다뤄야 할 조항입니다. 내 계약서 속 불가항력 조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지금 한 번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계약 해석, 일반 자문, 내용증명 발송, 여러 가지 상황마다 대응 방법은 달라집니다. 전문가와 상의하면, 불확실성을 훨씬 줄일 수 있습니다.
2025.10.10.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