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도가 어디까지 보완할 수 있는가
전문가 집단의 권위는 제도와 법률로 보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본은 신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만약 전문가가 신뢰를 잃는다면, 제도가 그 공백을 얼마나 보완할 수 있을까요?
건축 분야를 먼저 떠올려 보겠습니다. 부실 설계가 드러나거나, 건축사가 현장과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도장을 날인하는 행태가 반복되면, 사회는 즉각 제도를 강화하려 듭니다. 감리 제도를 손질하고, 건축사 징계 제도를 강화하며, 설계 검토 절차를 촘촘히 만드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국민이 곧장 건축사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는 위반자를 처벌할 수는 있어도, 이미 무너진 신뢰를 회복시켜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절차는 복잡해지고 행정 규제는 강화되지만, 건축사의 자율성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신뢰 상실이 제도의 강화로 이어지는 순간, 전문가 집단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축소시키는 셈이 됩니다.
변호사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의뢰인과의 관계에서 불투명한 수임료, 불성실한 사건 처리, 결과에 대한 과도한 책임 회피가 반복되면 사회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어, 이들이 최소한의 안전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뢰인이 변호사를 다시 신뢰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그러한 규제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 상담에서 변호사가 보여주는 성실한 경청, 사건 진행 과정에서의 투명한 보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나누는 자세가 곧 신뢰의 핵심입니다. 제도가 아무리 치밀해도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신뢰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제도적 규제는 사후적인 것입니다. 문제를 미리 막기보다는 문제가 터졌을 때 책임을 분명히 하는 역할에 가깝습니다. 이는 분명 중요합니다. 최소한의 울타리가 없다면, 신뢰가 무너졌을 때 전문가 집단 전체가 한순간에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도가 상실된 신뢰를 직접 복구할 수는 없습니다. 신뢰는 현장에서의 태도와 누적된 성실함을 통해서만 다시 쌓일 수 있습니다.
건축사의 도장을 예로 들면, 법률은 “날인은 책임을 의미한다”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국민이 실제로 그 도장을 믿게 되는 과정은 법 조항 때문이 아닙니다. 하자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했던 경험, 안전을 비용보다 앞세웠던 선택, 발주처와 시민 앞에서 끝까지 설명했던 태도, 이런 구체적 순간들이 신뢰의 실체를 형성합니다.
변호사의 변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도는 변호사가 반드시 서면을 제출하고 절차를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뢰인이 마음속으로 “이 변호사는 믿을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법정 서류가 아니라, 상담실에서 마주 앉아 사건의 무게를 함께 고민해 준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제도는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제도는 전문가의 권위를 ‘보완’할 수 있을 뿐 ‘대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제도는 신뢰가 무너진 뒤에 사회 전체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울타리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 울타리가 두꺼워질수록 전문가 집단의 자율성과 전문성은 더 축소됩니다. 진짜 힘은 결국 현장에서 신뢰를 쌓아 가는 태도에서만 나옵니다.
전문가의 권위는 제도로 보완될 수 없습니다. 제도는 신뢰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제도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신뢰의 공백이 사회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건축사의 도장도, 변호사의 변론도 결국 태도의 문제에서 권위를 얻습니다. 우리는 그 단순한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025.10.30.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