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급법] 설계용역대금 기성시기

변호사 · 2026. 4. 24.

건축설계 실무에서 용역대금 지급 시기를 정할 때 가장 흔하게 쓰이면서도 위험한 문구가 바로 “인허가 완료 시” 또는 “협의 완료 시”에 지급한다는 문구입니다. 발주자 입장에서는 인허가라는 목적을 달성해야 돈을 주는 것이 당연해 보이고, 설계자 입장에서도 관행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의심 없이 도장을 찍고는 합니다.

하지만 법률가의 시선에서 이 ‘빈칸’은 매우 위험한 함정입니다. 업무는 이미 끝났는데 발주처나 행정청의 사정으로 인허가가 지연될 경우, 설계자는 기약 없이 대금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도급법이 적용되는 거래라면, 업무 완료 시기를 명확히 정하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법 위반의 소지가 큽니다.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은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용역을 위탁할 때, 대금의 지급 기일과 방법이 명시된 서면을 ‘업무 착수 전’에 교부할 것을 강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지급 기일의 기준이 되는 ‘업무 완료 시점’이 객관적으로 특정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계약서에 “관할 관청의 승인 시 대금을 지급한다”라고만 적어두고, 승인이 나지 않으면 업무가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이는 사실상 대금 지급 시기를 발주자의 의사나 제3자의 결정에 전적으로 맡겨버리는 꼴이 됩니다. 하도급법은 이러한 불확정 기한 설정을 경계하며, 원칙적으로 목적물 등을 수령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대금을 지급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설계가 끝나도 허가가 안 나오면 아무 소용 없지 않느냐”는 논리가 관습처럼 통용되지만, 법적으로 설계용역은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도급계약의 성질을 가집니다. 일의 완성이란 사회통념상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성능을 갖춘 설계도서를 작성하여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도급법이 적용되는 하수급인인 설계자가 약정된 설계도서를 모두 작성하여 납품했다면, 인허가라는 행정적 절차와 무관하게 설계자의 의무는 일단 종료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허가 취득을 ‘성공보수’처럼 하도급대금의 지급 조건으로 걸어두는 것은 설계자에게 과도한 리스크를 전가하는 행위이며, 하도급법상 부당한 특약으로 간주될 위험이 큽니다.

하도급계약인지 여부를 막론하고도, 중요한 부분은 ‘납품’과 ‘승인’을 분리하는 감각입니다. 원도급계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약서 작성 시 대금 지급 시기를 단순히 “허가 시”로 뭉뚱그리지 말고, “설계도서 납품일로부터 며칠 이내” 혹은 “허가 접수 시”와 같이 설계자가 통제 가능한 시점으로 명확히 규정해야 합니다. 만약 발주처의 검수가 필요하다면, “납품 후 10일 이내에 이의가 없으면 검수한 것으로 본다”는 ‘승인 간주 조항’을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아무런 기준 없이 원발주처의 결재만 기다리는 침묵은 전문가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건축사로서 도면 위의 선 하나에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면서도, 특히 하도급계약의 경우에는 정작 자신을 보호할 계약서의 문장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설계비가 제때 들어오지 않아 조직이 흔들린다면, 그 어떤 훌륭한 설계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명할 계약서의 지급 시기 조항이 ‘언젠가’라는 막연한 기대를 담고 있지는 않은지, 전문가의 눈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결국 신뢰는 서로의 책임을 명확히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2026.04.24.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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