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감정] 판결문 안의 또다른 판결문, 건설감정서
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을 그리며 살 때는 도면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어 법정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주한 진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수만 장의 도면과 밤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내역서들도, 판사 앞에 놓인 단 한 권의 서류 앞에서는 무력해지곤 합니다. 바로 감정인이 제출한 건설감정서입니다. 법복을 입은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리지만, 건설 분쟁의 실질적인 결론은 사실상 감정인의 펜 끝에서 이미 완성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건설재판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증거재판주의’의 정점에서 마주하게 되는 가장 차갑고도 잔인한 현실입니다.
많은 실무자가 재판을 시작하며 “이 도면만 봐도 뻔한 건데, 판사님이 당연히 내 억울함을 알아주겠지”라는 기대를 품고 자신의 억울함을 열심히 전달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판사는 공학적 수치와 복잡한 공정의 선후 관계를 해독할 능력이 없습니다. 판사에게 도면은 암호문이고, 현장 사진은 그저 어지러운 공사판의 편린일 뿐입니다. 그래서 법은 판사를 대신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제3자, 즉 감정인을 임명합니다. 감정인이 산정한 기성고율이 70%라면 판결문의 숫자도 대체로 70%가 됩니다. 감정인이 이 하자는 설계 잘못이 아니라 시공 잘못이라고 적는 순간 건축사의 책임은 사라지고, 반대의 경우에는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도 있습니다. 감정서가 ‘제2의 판결문’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무 현장에서 우리가 수집하는 수많은 서증—회의록, 메일, 공문, 수정 도면—들은 결국 이 감정인을 설득하기 위한 재료에 불과합니다. 당연하게도 감정인은 신이 아닙니다. 때로는 현장 감각이 떨어진 이론가일 수도 있고, 수많은 사건에 치여 여러분의 사건을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우리는 성실히 일했다”는 감정적 호소만 담긴 자료를 증거로 낸다면, 감정인은 그 안에서 숫자를 뽑아내지 못합니다. 감정인의 눈에 비친 서증은 논리적으로 완결된 데이터여야 합니다. 특히 최근 개정된 2026 건설감정실무의 기준에 따르면, 감정인의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 근거에 의한 ‘수량 산출’과 ‘단가 적용’을 엄격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도면이 왜 추가 과업인지”를 증명하려면 단순한 탄원이 아니라, 당초 계약 대비 변경된 물량 대비표나 공정의 간섭 정도를 객관적인 자료로 정리해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감정인은 결코 여러분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감정서가 가진 ‘증거의 구속력’입니다. 대법원 판례는 감정 결과가 현저히 부당하지 않는 한 법원이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일단 감정서에 도장이 찍혀 법원에 제출되면, 그 숫자를 뒤집는 것은 특별히 예외적인 사정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리한 감정서가 제출되고 나서야 “선정된 감정인이 무능했다”거나 “감정인이 현장을 잘 몰랐다”고 항변해 보아야 재판부의 시선은 싸늘할 뿐입니다. 결국 건설감정 과정은 재판의 중간 과정이 아니라 사실상 재판의 끝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공사 단계마다 기록을 남기고 서류를 챙기는 이유는 훗날 혹시 모를 법정 다툼이 발생하여 법원 감정이 진행될 때, 내 현장을 전혀 모르는 감정인이 나타나 오판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법정이라는 공간은 진실을 찾는 곳이 아니라, 누가 더 객관적인 증거목록을 쌓아 올렸는지를 겨루는 전장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이 현장에서 흘린 땀방울이 숫자로 치환되지 못하고 감정서의 뒷전으로 밀려날 때, 그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제2의 판결문’인 감정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안타깝게도 법전만 파고든 일반적인 변호사들에게 건설 감정은 일종의 암호문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도면은 그저 복잡한 그림들의 집합일 뿐이고, 기성고 산출 근거나 설계 변경의 기술적 타당성을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감정인이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법리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공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단가를 적용해도, 현장의 언어를 모르는 변호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단순히 의뢰인에게 자료를 넘기고 검토의견만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결과가 나온 뒤에야 부랴부랴 ‘감정 결과가 부당하다’는 추상적인 법리로 다투려 하지만, 이미 숫자로 박제된 감정인의 고집을 꺾기엔 역부족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건설 감정 대응은 단순히 법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자리가 아닙니다. 감정인이 놓치고 있는 현장의 특수성을 도면과 내역서라는 객관적인 데이터로 번역하여 그들의 논리를 선제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건설감정실무에서는 감정인에게 더욱 정밀한 근거 제시를 요구하는 만큼, 대응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변호사 역시 감정인의 눈높이에서 공학적으로 대화하되 그 결과물을 다시 판사가 이해할 수 있는 법률의 언어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수많은 분쟁 현장에서 감정 대응 자문을 수행하며 느끼는 것은, 결국 승소의 열쇠는 법전에 적힌 글귀가 아니라 감정인의 펜 끝을 제어할 수 있는 ‘현장의 상황과 법리의 결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대처는 전문가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의뢰인-바로 여러분-의 실질적인 자산까지 위태롭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기록’은 무엇일까요? 최근 실무에서는 기존의 종이 서류에서 나아가 디지털 데이터의 증거력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단체 대화방에서의 업무 지시, 드론 촬영을 통한 공정 기록, BIM 데이터를 활용한 물량 비교 등은 이제 감정인이 무시할 수 없는 핵심 자료입니다. 특히 설계비 기성고 감정 시, 단순히 ‘진행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감정실무에서 제시하는 보정계수와 단계별 과업 완성도를 입증할 수 있는 ‘중간 산출물’의 보관 상태가 판결의 향방을 가릅니다. 설계 변경의 경우에도 발주처의 단순 변심인지, 법규 개정이나 현장 여건에 따른 불가피한 변경인지를 ‘변경 전후 비교 도면’과 ‘사유별 인덱스’등으로 정리해두지 않으면, 감정인은 이를 ‘설계자의 자의적 변경’이나 ‘무상 제공 서비스’ 등으로 치부해버릴 위험이 큽니다.
실무적인 조언을 드리자면, 사건이 터지고 나서 자료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건설감정은 결국 ‘데이터 정리 싸움’입니다. 평소에 공정별, 항목별로 서류를 인덱싱해두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감정인이 질문을 던졌을 때 “잠시만요, 찾아보겠습니다”가 아니라 “이 항목에 대한 근거 자료는 여기 인덱스 A-1번에 있습니다”라고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준비성 자체가 감정인에게 해당 증거의 신뢰도를 높이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적 내용을 법률적으로 번역하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번역의 원천 소스가 되는 기초 데이터는 결국 여러분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법은 여러분의 성실함을 스스로 증명해주지 않습니다. 감정인의 차가운 보고서에 여러분의 정당한 권리가 제대로 기록되게 만드는 것이 법정에서 자신을 가장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법률적 방패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무심코 지나친 회의록 한 장이, 훗날 판결문의 숫자를 바꿀 유일한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바로 지난 주에 있었던 발주처와의 회의록을 꺼내 설계변경 요청사항과 주체가 제대로 명시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을 그리며 살 때는 도면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어 법정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주한 진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수만 장의 도면과 밤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내역서들도, 판사 앞에 놓인 단 한 권의 서류 앞에서는 무력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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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9.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