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건설분쟁의 종착지
법정과 감정이라는 거대한 설득의 무대들을 거치고 나면, 소송 당사자들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화려해 보이는 변론기술과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기술적 분석을 모두 걷어내고 났을 때, 판결문 뒷장에 마지막 뼈대로 남는 것은 결국 평소 현장에서 무심히 축적해 온 ‘기록’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소송이 터진 후에야 부랴부랴 도면수정내역을 뒤적이고 전임자의 완전치 못한 메일함을 뒤지며 증거를 찾으려 애를 쓰는 실무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소송이라는 냉혹한 전장에서는 사후에 급조된 소명서나 일방적인 진술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점을, 지금쯤이면 잘 알고 계실 것이겠지요. 감정인이 오직 객관적인 데이터만을 신뢰하는 것과 같이, 법원은 오직 분쟁이 발생하기 전 ‘현장의 정직한 사실관계’가 담긴 처분문서와 적법한 기록만을 증거로 인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무에서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지점은 바로 ‘입증책임’의 문턱입니다. 법률을 전공하지 않은 실무자들은 “내가 일을 더 해준 것이 분명하고 현장에 그 결과물이 남아있으니 상대방이 돈을 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억울해합니다. 하지만 법의 논리는 철저하리만치 차갑습니다. 추가공사대금을 청구하는 자는 추가공사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이 발주자의 ‘지시나 합의’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까지 스스로 증명해내야 합니다. 감정인이 현장에 나가 기성고를 측정하고 물량을 산출하더라도, 그것이 기존 계약 범위 내의 시공인지 아니면 별도의 약정에 의한 추가공사인지까지 판별해 주지는 않습니다. 도면에 기술적 지표가 남아있고 현장에 타설된 콘크리트가 존재하더라도, 당시에 오간 서면 유통 기록이 없다면 법원은 이를 ‘계약 없는 임의 시공’ 혹은 ‘하자 보수 행위’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감정인의 생각을 우리 쪽으로 움직이고 판사의 심증을 굳히는 진짜 무기는 평소의 증거관리 습관에서 나옵니다. 매일 작성하는 작업일지 또는 공정보고, 공정 회의 끝에 원·피고 담당자가 나란히 서명한 회의록, 그리고 변경 도면을 송부하며 남긴 이메일 기록과 같은 증거들은 소송 단계에서 수천만 원짜리 감정서의 결론을 뒤바꾸는 결정적인 쐐기가 됩니다. 시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설계 변경과 돌발적인 기후 조건, 그리고 자재 수급의 변동을 그때그때 문서화하여 상대방의 확인을 받아두는 것만이 실무자가 분쟁이라는 늪에서 스스로를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가이드라인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법정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건설분쟁과 그에 따른 재판이라는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마주해야 할 본질은 단순한 소송 테크닉에 관한 신기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장의 거친 먼지 속에서 흘린 땀방울과, 도면 위에서 밤을 지새운 건축사의 고뇌를 어떻게 가장 온전하게 증명해낼 것인가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태도를 단단히 명심해야 합니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현장은 기록하지 않는 자의 억울함을 대변해 주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책상 위에 놓인 작업일지와 설계 변경 검토서가 미래의 판결문을 바꾸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철저한 기록만이 여러분이 세워 올린 건축과 전문가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2026.05.26.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