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분쟁] 설계도대로 지어도 하자책임은 남는다

설계 / 감리 · 2026. 8. 18.

하자 분쟁 상담에서 시공사 쪽이 가장 먼저 내놓는 항변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설계도대로 시공했습니다.” 도면을 그린 것은 설계사무소이고 그 도면을 승인한 것은 발주자이니, 도면대로 지은 시공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 항변은 실제로 얼마나 통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원칙적으로는 통합니다. 민법 제669조는 하자가 도급인이 제공한 재료나 지시로 인해 생긴 때에는 수급인에게 담보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정하고 있고, 대법원은 수급인이 설계도면의 기재대로 시공한 경우 이는 도급인의 지시에 따른 것과 같아서, 그로 인해 목적물에 하자가 생겼더라도 원칙적으로 수급인에게 하자담보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일관되게 판시해 왔습니다(대법원 1996. 5. 14. 선고 95다24975 판결). 다만 이 원칙에는 단서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수급인이 그 지시나 도면이 부적당함을 알면서도 도급인에게 고지하지 않은 경우에는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대법원 2016. 8. 18. 선고 2014다31691 판결).

올해 봄 서울행정법원에서, 이 단서가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서울행정법원 2026. 4. 16. 선고 2025구합53347 판결, 법률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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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설계도대로 시공해도 하자 생기면 책임져야” - 법률신문

발주처로부터 제공받은 설계도대로 시공했어도, 건축물 하자 발생시 시공사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시공사는 건축 전문가로서 설계도면의 적합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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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관계는 이렇습니다. 한 대형 건설사가 발주사로부터 도급받아 20개 동, 178세대 규모의 단지형 연립주택을 시공했고, 2021년 2월 사용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동은 주출입구에서 주차장과 도로로 나가려면 계단을 거쳐야만 했고,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 요구하는 경사로, 즉 장애인 접근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관리단이 2023년 5월 국토교통부 하자심사·분쟁조정위원회에 하자 심사를 신청했고, 위원회는 2024년 8월 이를 하자로 판정했습니다. 시공사는 이의신청이 기각되자 하자판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법정에서 시공사는 세 가지 항변을 폈습니다. 첫째, 경사로가 빠진 동은 8세대뿐이어서 10세대 이상에 적용되는 편의시설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다. 둘째, 주출입구는 지하주차장과 연결되어 단차가 없으므로 경사로가 필요 없다. 셋째, 접근로가 없는 것은 설계상 하자이고 시공사는 발주자의 지시에 따라 도면대로 시공했을 뿐이므로 책임이 없다.

법원은 세 가지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대수 산정에 대해서는, 단지형 연립주택은 하나의 대지에 건설된 여러 동의 연립주택이므로 동별이 아니라 전체 178세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주출입구에 대해서는, 연립주택의 용도가 거주 시설인 이상 주출입구는 지상 1층 출입구로 보아야 하고, 그곳에 이르는 통로에 계단 외의 접근로가 없는 것은 하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핵심인 세 번째 항변에 대해 재판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공사는 전문가로서 하자 없는 일을 완성할 능력과 의무가 있는 자이고, 관련 법령에 위반된 설계도면을 제공받았다면 그 적합성을 스스로 검토하여 도급인에게 적절한 의견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깐 절차 이야기를 짚고 가겠습니다. 이 사건이 민사법원이 아니라 행정법원에서 다투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공동주택관리법상 하자심사·분쟁조정위원회의 하자 여부 판정은 행정처분의 성격을 가지므로, 판정에 불복하는 사업주체는 이의신청을 거쳐 행정소송으로 취소를 구하게 됩니다. 판정이 유지되면 사업주체는 하자를 보수할 의무를 지고, 정당한 사유 없이 따르지 않으면 과태료 제재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입주자 쪽에서 보면 소송보다 비용과 시간의 문턱이 훨씬 낮은 통로인 셈입니다. 물론 이 판결은 1심이므로 상급심에서 다시 다투어질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이 판결이 새 법리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틀은 여전히 95다24975 판결의 원칙과 단서입니다. 주목할 부분은 단서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종래 이 단서는 수급인이 도면의 문제를 실제로 알았던 경우를 겨냥한 것으로 읽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판결은 법령 위반이라는 객관적 사정 앞에서, 시공사가 몰랐다는 사정을 따지기보다 전문가라면 검토해서 알았어야 한다는 쪽으로 무게를 옮깁니다. 도면이 건축 관련 법령에 어긋나 있다면, 그것을 걸러내는 일까지가 시공 전문가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시공사의 규모와 전문성이 클수록 이 기대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무에 계신 분들께는 이 판결이 각자 다른 숙제를 남깁니다.

시공사라면, 착공 전 도면 검토 단계에서 법령 적합성 문제를 발견했을 때 이를 발주자에게 서면으로 고지한 기록이 곧 면책의 동앗줄이 됩니다. 질의서, 공문, 회의록 어디에도 그 흔적이 없다면, 이제 “설계 탓”이라는 항변은 법정에서 점점 힘을 잃을 것입니다. 반대로 고지했는데도 발주자가 그대로 진행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남아 있다면, 민법 제669조의 원칙이 시공사를 지켜 줍니다.

설계자라면, 이 판결을 시공사에게 책임이 넘어갔다는 소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법령 검토의 일차적 책임은 여전히 설계에 있습니다. 시공사가 하자보수 책임을 지고 나면 그 부담은 구상이라는 이름으로 설계 쪽에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도면에 남는 법령 위반은 결국 그 도면에 도장을 찍은 사람의 문제로 돌아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주자나 발주자 입장이라면, 시공사의 “설계대로 지었다”는 항변 앞에서 물러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판결이 보여 줍니다. 하자심사·분쟁조정위원회의 하자판정 절차는 소송보다 문턱이 낮고, 이 사건처럼 대형 건설사를 상대로도 판정이 유지됩니다. 다만 어느 입장에 서든 승부처는 같습니다. 그 하자가 설계에서 왔는지 시공에서 왔는지, 법령 기준에 미달하는지, 보수에 얼마가 드는지 — 결국 도면과 시방서와 법령과 현장을 겹쳐 읽는 작업, 즉 감정과 판정의 영역에서 결론의 대부분이 정해집니다.

건물을 짓는 일에서 도면은 발주자와 시공사 사이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허공에 서지 않습니다. 그 아래에는 법령이라는 지반이 깔려 있고, 지반에 맞지 않는 약속은 아무리 정확하게 이행되어도 언젠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도장을 찍기 전에, 그리고 다툼이 시작된 뒤에는 더더욱, 약속의 문장만이 아니라 그 아래 지반까지 내려가 읽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026.08.18.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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